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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ㆍ27법난 겪고 “오늘의 보살되자” 서원
글쓴이 : 삼보사 날짜 : 10-06-03 15:48 조회 : 1592


삼보사 주지 지원스님(上)
10ㆍ27법난 겪고 “오늘의 보살되자” 서원

‘서울 북서쪽 은평구 역촌오거리에 상서로운 불광이 충만하니, 삼보도량이 불가사의한 덕화(德化)로다.’ 25년 전, 서울 삼보사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어수선하고 부조리했던 1980년대 한국사회를 덕행으로 감화시키기 위해 삼보사 주지 지원스님은 중생구제의 첫 깃발을 꽂았다.



1983년 신도 15명으로 15평 포교당 개원

전단지 들고 거리 홍보…신도들 법당 메워



삼보사 창건 당시 지원스님은 10.27 법난의 참상을 직시하고 심기일전하여 불보살에 서원했다.

‘오늘의 보살이 되자! 큰 서원의 갑옷을 두르고 대승의 정법을 실천하는 보살이 되자! 보살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살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오탁악세에 침윤하는 말세의 중생들과 더불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알고 바르게 믿으며 바르게 실천수행하는 동참섭행(同參攝行)하는 보살이 되자!’ 스님의 서원에 힘입어 도심 속 생활불교 실천도량인 삼보사가 창건됐다.

처음엔 불사를 할만한 돈도 없고 법회를 할만한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신도들과 함께 십시일반으로 겨우 임대법당을 하나 마련했다. 그 날이 1983년 10월5일이다. 현재의 삼보사에서 30m 동북방향에 위치한 ‘15평 법당’이다. 삼보사의 전신인 이 법당은 ‘은평포교원’으로 불렸다.

은평포교원에는 부처님 한분을 겨우 모셨을 뿐, 후불탱화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널빤지 위에 금빛 보자기로 둘러서 법상을 대신했다. 그 초라한 법상에서 무진장스님 녹원스님 등 당시 법사로 초청된 수많은 스님들은 감로법문을 펼쳤다.

<사진> 삼보사의 전신인 은평포교원은 1983년 임대법당 형식으로 문을 열었다. 사진제공=삼보사

지원스님은 미소를 머금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 시절에는 법회를 알릴만한 소식지도 없었습니다. 청년회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만든 한 장짜리 전단지에다 법회를 홍보해서 우리들이 직접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지요. 처음 15명 안팎이던 법회 참석자가 불어서, 급기야 200여 명까지 늘어났답니다. 법회가 있는 날이면 법당은 이미 발디딜 틈없이 꽉 들어찼고 복도와 옥상 할 것 없이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

지원스님은 ‘삼보 어린이법회’를 열고 중고생, 대학생 등 계층별로 포교프로그램을 구축했다. 연령과 수준에 맞는 ‘맞춤포교’를 시작했다. 신도가 늘고 신도회가 조직화되자, 삼보사는 6개월만에 ‘임대법당’에서 ‘전세법당’으로 향상됐다. 전세법당으로 이전하여 신바람이 난 신도들은 어머니 합창단, 관현악단, 어린이 찬불가 합창단 등을 결성했고, 스님은 이들 단체를 토대로 ‘문화포교’의 첫 단추를 끼웠다. 마침내 1988년 7월 ‘정법수행 정진도량’을 표방하고 오늘날의 삼보사 부지를 확보해서 1991년 ‘400평 규모의 법당’을 준공했다. 그 사이 삼보사 회보 월간 <장명등>도 창간됐고 삼보사 파주 포교원도 문을 열었다. 약 8년만에 ‘15평 임대법당’이 ‘400평 사찰’로 성장했다.

일취월장하기까지, 스님은 신도들과 손잡고 사찰재정 확보를 위해서 여러 가지 방편을 동원했다.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열었던 각종 바자회는 물론이고 몇몇 신도들과 같이 새벽 중부시장에서 김과 건어물 등 물건을 떼와 팔아보기도 했다. 그토록 어렵게 사찰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는 가운데 스님은 사찰에 오는 신도를 한사람도 허투로 대하지 않았다. 그들의 고민을 상담하고 상처를 치유해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전법활동에 매진했다.

스님의 포교 지평은 날이 갈수록 넓어졌다. 법당을 벗어나서 교도소와 고아원 양로원 군부대 등지를 직접 발로 뛰면서 중생포교에 나섰다. 사찰 합창단 등을 동반하여 신도들과 함께 포교와 신행을 생활화했다. ‘생활불교 실천’은 도심포교에 있어 스님이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스님이 중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스님이 시인으로 등단해서 시를 쓰며 삶의 희로애락을 살피는데서 비롯됐으리라.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등단한 스님은 문서포교에도 나름의 입지를 굳혔다. 시집 〈장명등〉을 비롯해 〈마음이 열리면 천당도 보이지요〉〈묘법연화경〉 <법회요전〉 등 저서를 발간했다. “원래 시(詩)라는 것이 절(寺)의 언어(言)를 말하지 않습니까.” 작사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 수십 편의 찬불가를 작사했는데, 그 중 ‘천수천안 관음송가’는 유려한 가사로 불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찬불가이다. “법문은 30분을 꼬박 투자해야 불자들에게 감응을 주는데 노래는 단 5분만에 감응 이상의 것을 주지요. 이러한 현상은 문화포교의 중요성과도 일맥상통합니다.”

1992년 9월에는 <법화경> 산림 ‘백고좌 대법회’를 설단해서 그 해 12월9일까지 100일간 날마다 선지식을 초청해서 법회를 봉행했다. 매일 1000여 명의 대중이 운집해서 청법했다. 이어서 1993년에는 ‘민족통일 기원 불교성가 대합창 음악제’를 개최했다. 제주도에서 첫 공연을 시작으로 1994년 9월 백두산 천지에서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기원하는 행사를 열었다. 강원지역과 창원 마산 부산 대구 대전 등 지방공연을 이어갔고 1995년 4월 역사적인 서울공연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회향음악제를 봉행했다.

“그 당시 세종문화회관에서 불교음악제를 봉행한다는 것은 큰 화제가 됐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 6000여 명의 관중이 열광했던 그 음악제를 잊을 수 없어요. 그 장엄하고 웅대한 선율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천음과도 같았으니까요.”

1993년 10월 삼보사 창건 10주년 행사가 열린 날, 스님은 신도 15명으로 시작한 삼보사가 3000세대의 삼보가족으로 번창하기까지 10년 세월을 되돌아보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이 날 법문을 통해 스님은 “법화사상으로 인간마을을 청정 불국토로 가꾸자”고 역설하기도 했다. 당시 삼보사는 10주년 기념사업으로 ‘민족통일기원 <법화경> 100만 권 전법불사’를 전개하했다. 지원스님은 이 불사를 위해 <법화경>을 새로 편역했다. 법화사상의 생활화를 위해 지역단위로 법화경독송회를 결성한 스님은 당시 10여 개 지역에 법화경독송회가 만들어져 불법 홍포에 이바지했다.

“우리 속담 가운데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속에는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정진하는 사람 앞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뜻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더욱 부지런히 정진하며 법 닦기를 생각하면 오래지 않아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날 뿐만 아니라 번뇌가 없는 행을 성취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같은 정진은 실상지혜(實相智慧)를 바탕으로 하여 대보리를 인(因)으로 삼고, 동체대비를 근(根)으로 삼으며 퇴전이 없는 심신의 노력으로 방편을 삼습니다. 정진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입니다.”


제공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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